바비 던바 실종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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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비 던바 실종 사건은 1912년 루이지애나주에서 발생한 미스터리한 사건으로, 낚시 여행 중 실종된 소년 바비 던바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을 다룬다. 8개월 후, 윌리엄 캔트웰 월터스가 바비와 외모가 비슷한 소년과 함께 발견되었고, 소년은 바비로 확인되어 가족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이후 DNA 검사를 통해 소년이 진짜 바비 던바가 아님이 밝혀졌고, 진짜 바비의 행방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이 사건은 실종 아동 문제, 사법 시스템의 한계, 가족 간의 갈등 등 다양한 측면에서 사회적 의미를 갖으며, 2008년 라디오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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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던바 실종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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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 사건 개요 | |
제목 | 바비 던바 실종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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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912년 8월 23일 |
실종자 | 로버트 "바비" 클래런스 던바 (4세) |
장소 | 세인트랜드리 패리시, 루이지애나, 미국 |
유형 | 실종자 |
보고된 사망자 | 1명 (던바, 부재선고) |
용의자 | 윌리엄 캔트웰 월터스 (무죄) |
평결 | 유죄 (취소됨) |
혐의 | 유괴 (기각됨) |
형량 | 2년 복역 (취소됨) |
결과 | 미제 사건 |
2. 실종
로버트 클래런스 "바비" 던바는 루이지애나주 오펄루서스에 거주하던 레시 던바와 퍼시 던바 부부의 장남으로, 1908년 5월 23일에 태어났다. 1912년 8월, 던바 가족은 루이지애나주 세인트랜드리 교구에 있는 스웨이즈 호수로 낚시 여행을 떠났다. 여행 중이던 8월 23일, 당시 4세였던 바비 던바가 실종되었다.
8개월간의 수색 끝에, 당국은 피아노와 오르간의 조율 및 수리를 전문으로 하는 떠돌이 잡역부 윌리엄 캔트웰 월터스를 찾아냈다. 월터스는 바비 던바의 묘사와 일치하는 소년과 함께 미시시피주를 여행하고 있었다. 월터스는 그 소년이 사실 자신의 가족을 위해 일하는 여성의 아들인 찰스 브루스 앤더슨(일반적으로 브루스라고 불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소년의 어머니가 줄리아 앤더슨이라는 여성이며, 그녀가 기꺼이 자신에게 양육권을 넘겨주었다고 말했다. 줄리아 앤더슨은 나중에 월터스의 이러한 주장을 확인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터스는 체포되었고 당국은 던바 가족에게 미시시피주로 와서 소년을 식별해달라고 요청했다.
8개월간의 수색 끝에 당국은 미시시피주를 여행 중이던 떠돌이 잡역부 윌리엄 캔트웰 월터스를 찾아냈다. 그는 바비 던바의 묘사와 일치하는 소년을 데리고 있었다. 월터스는 그 소년이 자신의 가족을 위해 일하던 줄리아 앤더슨이라는 여성의 아들, 찰스 브루스 앤더슨(보통 브루스라고 불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앤더슨이 자신에게 기꺼이 양육권을 넘겨주었다고 말했고, 앤더슨 역시 나중에 이를 확인해주었다. 그럼에도 월터스는 체포되었고, 당국은 던바 부부에게 미시시피주로 와서 소년을 확인해달라고 요청했다.
월터스가 납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후, 그의 변호사는 판결에 대해 항소했고, 이는 루이지애나 대법원에 의해 성공적으로 뒤집혔다.[10][11][12] 월터스에게는 새로운 재판을 받을 권리가 주어졌지만, 오펄루사 검찰은 첫 번째 재판에서 발생한 과도한 비용을 이유로 그를 다시 재판하지 않고 석방하기로 결정했다.[13][14]
법원의 판결 이후, 소년은 던바 가족의 보호 아래 남겨져 남은 생을 바비 던바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그는 성장하여 결혼했고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7]
사건 발생 수십 년 후, 바비 던바의 손녀 마가렛 던바 커트라이트의 노력 등으로 2004년 DNA 검사가 실시되었다.[15] 검사 결과, 바비 던바로 알려졌던 인물은 던바 가문의 친척이 아님이 밝혀졌다. 이는 그가 실제 바비 던바가 아니었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했지만, 1912년 실종된 진짜 바비 던바의 행방은 여전히 알 수 없게 되었다.[15]
3. 수색과 윌리엄 캔트웰 월터스 체포
4. 던바 가족과 앤더슨의 상반된 주장
신문 보도는 소년과 레시 던바의 첫 만남에 대해 서로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다. 한 기사는 소년이 레시를 보자마자 "엄마"라고 외치며 서로 껴안았다고 묘사했지만, 다른 기사에서는 소년이 울음을 터뜨렸고 레시 던바는 그가 자신의 아들인지 확신하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던바 부부가 처음에 소년의 신원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소년이 던바 부부의 다른 아들 알론조를 만났을 때의 반응에 대한 보도 역시 상반되었다. 한쪽에서는 소년이 알론조를 즉시 알아보고 이름을 부르며 키스했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쪽에서는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고 전했다. 다음 날, 레시 던바는 소년을 목욕시킨 후 그의 몸에 있는 점과 흉터를 확인하고는 그가 틀림없는 자신의 아들 바비라고 확신했다. 소년은 던바 부부와 함께 오펄루서스로 돌아왔고, 마을 사람들은 축포를 쏘며 그의 "귀향"을 축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온 줄리아 앤더슨이 나타나 월터스의 주장을 뒷받침하며 소년이 자신의 아들 브루스라고 주장했다. 앤더슨은 미혼모였으며 월터스 가족의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녀는 월터스가 친척 방문을 이유로 며칠간 아들을 데려가는 것을 허락했지만, 그 이상 데리고 있는 것에는 동의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앤더슨 앞에는 던바 부부가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소년을 포함해 비슷한 나이대의 소년 다섯 명이 제시되었다. 문제의 소년이 나타났지만, 그는 앤더슨을 알아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앤더슨은 그가 자신이 찾던 소년인지 물었으나 명확한 답을 듣지 못했고, 결국 확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음 날, 앤더슨은 소년의 옷을 벗겨 확인한 후 그가 자신의 아들 브루스임을 더욱 강하게 확신했다. 하지만 그녀가 첫 만남에서 아들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소문이 이미 퍼진 뒤였다. 당시 그녀에게는 이미 두 명의 아이를 더 낳아 총 세 명의 사생아가 있었는데(다른 두 아이는 사망한 상태였다), 이러한 사실과 함께 그녀의 도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언론 보도가 이어지면서 앤더슨의 주장은 힘을 잃고 묵살되었다.
앤더슨은 긴 법정 싸움을 벌일 형편이 되지 않아 노스캐롤라이나주로 돌아가야 했다. 그녀는 나중에 월터스의 유괴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월터스가 무죄이며 소년이 자신의 아들임을 법원이 인정해달라고 호소했다. 재판 과정에서 그녀는 미시시피주 팝라빌 주민들과 알게 되었는데, 이들 중 다수는 월터스의 무죄를 증언하기 위해 법정에 섰다. 팝라빌 주민들은 월터스와 소년이 마을에 머무는 동안 그들을 잘 알게 되었으며, 바비 던바가 실종되기 전부터 월터스가 소년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러한 증언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소년이 바비 던바라고 판결했다. 월터스는 유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소년은 던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남은 생을 바비 던바로 살았다. 월터스는 2년간 복역 후 항소심에서 유죄 판결이 뒤집혔고, 검찰이 재기소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석방되었다.
5. 윌리엄 캔트웰 월터스의 재판과 석방
구금에서 풀려난 월터스는 다시 유랑 생활을 시작했다. 월터스의 형제 손자들에 따르면, 그는 방문할 때마다 항상 납치 혐의에 대한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고 한다.[7] 월터스는 1945년 4월 7일에 사망했으며, 아내 곁인 콜로라도주 푸에블로에 묻혔다.[7]
6. 브루스 앤더슨(바비 던바)의 삶
성인이 된 바비 던바의 삶에는 그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몇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2008년, 줄리아 앤더슨의 아들 중 한 명인 홀리스는 1944년에 바비 던바/브루스 앤더슨으로 알려진 남자가 자신의 사업장을 찾아와 대화를 나눴다고 This American Life에 밝혔다. 홀리스의 여동생 줄스 역시 비슷한 경험을 전했는데, 던바로 추정되는 남자가 그녀가 일하던 주유소에 들러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던바 가족 측에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바비 던바의 아들 제럴드에 따르면, 가족 여행 중 팝라빌을 지날 때 그의 아버지가 "저 사람들이 나를 데리러 왔던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바비 던바는 1966년 3월 8일에 사망했으며, 루이지애나주 오펄루사의 벨뷰 기념 공원에 묻혔다.[7] 그의 아내는 1994년에 사망하여 남편 곁에 안장되었다.
7. 진실 규명을 위한 노력과 DNA 검사
7. 1. 마가렛 던바 커트라이트의 조사
바비 던바가 사망한 지 여러 해가 흐른 뒤, 그의 손녀 중 한 명인 마가렛 던바 커트라이트는 사건에 대한 자체 조사를 시작하여 신문 기사를 꼼꼼히 살펴보고, 줄리아 앤더슨의 아이들을 인터뷰했으며, 월터스 변호사가 유괴 재판과 항소 과정에서 제시한 메모와 증거를 검토했다.[15] 커트라이트는 처음에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던바 가문의 일원임을 증명하고 싶어했지만, 연구 결과 그녀의 믿음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2004년, AP통신 기자가 이 이야기에 대해 가족에게 접근한 후, 밥 던바 2세는 DNA 검사에 동의했다. 그 결과 던바 2세는 바비 던바 시니어(1912년에 실종된 원래의 바비 던바)의 남동생인 알론조 던바의 아들이자 그의 사촌이라고 여겨졌던 사람과 혈연관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15] DNA 검사 결과가 결정적이므로, 진짜 던바의 운명은 여전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7. 2. DNA 검사 결과
바비 던바가 사망한 지 여러 해가 지난 후, 그의 손녀 중 한 명인 마가렛 던바 커트라이트는 사건에 대한 자체 조사를 시작했다. 그녀는 신문 기사를 자세히 검토하고, 줄리아 앤더슨의 아이들을 인터뷰했으며, 월터스 변호사가 유괴 재판과 항소 과정에서 제시한 메모와 증거를 살펴보았다.[15] 커트라이트는 처음에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던바 가문의 일원임을 증명하고 싶어했지만, 연구 결과 그녀의 믿음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2004년, AP 통신 기자가 이 이야기에 대해 가족에게 접근하자, 밥 던바 2세(바비 던바로 알려진 인물의 아들)는 DNA 검사에 동의했다. 검사 결과, 밥 던바 2세는 바비 던바 시니어(1912년에 실종된 원래의 바비 던바)의 남동생인 알론조 던바의 아들(즉, 그의 사촌으로 여겨졌던 사람)과 혈연관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15] 이 DNA 검사 결과는 바비 던바로 알려졌던 인물이 실제로는 던바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음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따라서 진짜 바비 던바의 운명은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남게 되었다.
8. 사건의 의의와 영향
재판 후, 포플러빌 주민들은 줄리아 앤더슨을 환영했고, 그녀는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여 결국 결혼하고 일곱 명의 아이를 낳았다.[7] 그녀의 후손들에 따르면,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고, 교회를 설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작은 지역 사회의 간호사이자 산파로 봉사했다. 그녀의 아이들은 앤더슨이 포플러빌에 정착한 후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잃어버린 아들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으며, 그들의 가족은 항상 그가 던바 가족에게 납치되었다고 여겼다고 말했다. 그녀는 1940년 2월 1일에 사망했으며, 포플러빌의 포드 크릭 묘지에 묻혔다.[10]
2008년, 앤더슨의 아들 중 한 명인 홀리스는 1944년에 바비 던바/브루스 앤더슨으로 알려진 인물이 자신의 사업장을 방문하여 그들과 대화를 나눴다는 이야기를 ''This American Life''에 전했다. 홀리스의 여동생 줄스도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했는데, 그녀는 던바라고 믿는 한 남자가 그녀가 일하던 주유소에 와서 오랫동안 그녀와 대화를 나눴다고 말했다. 던바 가족 또한 바비 던바의 아들 제럴드가 말한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가족이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포플러빌을 지나갈 때, 던바는 "저 사람들이 나를 데리러 왔던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윌리엄 칸트웰 월터스는 납치 혐의로 2년의 징역형을 살고 난 후, 그의 변호사는 유죄 판결에 대한 항소에 성공했고, 이는 루이지애나 대법원에 의해 받아들여졌다.[10][11][12] 월터스에게는 새로운 재판을 받을 권리가 주어졌지만, 오펄루사 검찰은 첫 번째 재판의 과도한 비용을 이유로 그를 다시 재판하지 않고 대신 석방했다.[13][14] 구금에서 풀려난 후, 월터스는 유랑 생활을 재개했다. 월터스는 1945년 4월 7일에 사망하여 아내 곁에 콜로라도주 푸에블로에 묻혔다.[7] 월터스의 형제의 손자들은 어릴 때 그가 보통 일 년에 몇 번 할아버지를 방문했고, 이러한 방문 동안 월터스는 항상 납치 혐의에 대해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고 전했다.
바비 던바라는 이름으로 자란 소년은 결혼하여 네 자녀를 두었고, 1966년 3월 8일에 사망했다. 그는 루이지애나주 오펄루사의 벨뷰 기념 공원에 묻혔다.[7] 그의 미망인은 1994년에 사망하여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9. 2008년 라디오 다큐멘터리
2008년 3월, 공영 라디오 인터내셔널(Public Radio International)의 프로그램인 ''This American Life''는 마거릿 던바 커트라이트가 조사한 사건에 대한 라디오 다큐멘터리 ''바비 던바의 유령''(The Ghost of Bobby Dunbar)을 방영했다.[15] 커트라이트는 이 다큐멘터리에서 진짜 바비 던바가 낚시 여행 중 악어에게 잡아먹혔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녀는 자신의 조사 결과가 줄리아 앤더슨 가족에게는 그녀의 주장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었고, 윌리엄 월터스 가족에게는 납치 혐의에 대한 무죄를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밝혔다. 또한, 이러한 조사 결과가 던바 가문 내에서는 불화를 일으켰다고 전했다. 그녀의 할아버지 자녀와 손주 대부분은 스스로를 던바 가문의 일원으로 여기며 기존의 가족 관계를 소중히 여겼고, 이 사건을 다시 파헤쳐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커트라이트에게 분개했다고 한다.[15]
10. 진짜 바비 던바의 운명
바비 던바(로 알려진 소년)가 사망한 지 여러 해가 지난 후, 그의 손녀 중 한 명인 마가렛 던바 커트라이트는 사건에 대한 자체 조사를 시작했다. 그녀는 신문 기사를 꼼꼼히 살펴보고, 줄리아 앤더슨의 자녀들을 인터뷰했으며, 월터스 변호사가 유괴 재판과 항소 과정에서 제시한 메모와 증거를 검토했다.[15] 커트라이트는 처음에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던바 가문의 일원임을 증명하고 싶어했지만, 연구 결과 그녀의 믿음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2004년, AP통신 기자가 이 이야기에 대해 가족에게 접근한 후, 바비 던바(로 알려진 소년)의 아들인 밥 던바 2세는 DNA 검사에 동의했다. 검사 결과, 밥 던바 2세는 1912년에 실종된 진짜 바비 던바의 남동생인 알론조 던바의 아들(즉, 그의 사촌으로 여겨졌던 인물)과 혈연관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15] DNA 검사 결과는 결정적이었으며, 이를 통해 진짜 바비 던바의 운명은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남게 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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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bby Dunbar mystery solved? DNA test puts 100-year-old mystery to 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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